창덕궁 연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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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연경당 | ||||
창덕궁 연경당 昌德宮 演慶堂 | |
소재지 |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
수량 | 1동 |
지정연도 | 2012년 8월 16일 |
제작시기 | 조선시대, 1827년 / 1828년 창건 |
연경당의 안채와 사랑채 외경 |
1. 소개 [편집]
昌德宮 演慶堂
창덕궁 후원에 있는 사대부가 형식의 건물이다. 순조 말에 대리청정을 맡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와 어머니 순원왕후의 존호를 올리는 의식을 치르면서 잔치를 하기 위해 후원 내 진장각(珍藏閣) 옛 터에 세운 연회장이었다. 한동안은 효명세자가 사대부의 생활을 체험하기 위해 지었다는 설과 순조가 유유자적하게 지내고 싶어 지었다는 설이 알려져있었다. 하지만 아래에 나온 것처럼 효명세자가 지었을때는 분명히 연회장이었고, 사대부가 형식으로 개조된 것은 고종 때로 보인다.
연경당이라 하면 보통 사랑채 건물 한 채, 또는 사랑채 - 안채만을 가리키지만, 다른 부속 건물들까지 통틀어 일컫는 경우도 많다.
건물 이름인 ‘연경(演慶)’은 ‘경사스러운(慶) 행사를 연행(演行)[1]한다’는 뜻이다.이 분 집이 아니다.
연경당에 대한 3D VIEW 영상.
창덕궁 후원에 있는 사대부가 형식의 건물이다. 순조 말에 대리청정을 맡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와 어머니 순원왕후의 존호를 올리는 의식을 치르면서 잔치를 하기 위해 후원 내 진장각(珍藏閣) 옛 터에 세운 연회장이었다. 한동안은 효명세자가 사대부의 생활을 체험하기 위해 지었다는 설과 순조가 유유자적하게 지내고 싶어 지었다는 설이 알려져있었다. 하지만 아래에 나온 것처럼 효명세자가 지었을때는 분명히 연회장이었고, 사대부가 형식으로 개조된 것은 고종 때로 보인다.
연경당이라 하면 보통 사랑채 건물 한 채, 또는 사랑채 - 안채만을 가리키지만, 다른 부속 건물들까지 통틀어 일컫는 경우도 많다.
건물 이름인 ‘연경(演慶)’은 ‘경사스러운(慶) 행사를 연행(演行)[1]한다’는 뜻이다.
연경당에 대한 3D VIEW 영상.
2. 역사 [편집]
지은 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궁궐지》에는 1828년(순조 28년)으로 되어있는 반면, 《한경지략》과 《동국여지비고》에는 1827년(순조 27년)으로 적혀 있다.
건립 후 효명세자가 신하들을 접견하거나 진작례[2]를 거행하였다. 헌종 대 이후에는 익종으로 추존 된 효명세자의 어진과 모훈[3]자료를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되다가 1857년(철종 8년)에 터가 서늘하고 습하다는 이유로 익종의 초상화를 다른 곳으로 옮겨 오랫동안 빈 건물로 있었다.#
고종 시기인 1865년(고종 2년) 새로 증축, 신축하였으나 곧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한동안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이후 1884년(고종 21년) 갑신정변 때 청나라 군대에 쫓긴 개화파 수뇌들이 고종을 데리고 이곳으로 잠시 피신하기도 했고, 이외에도 고종과 순종이 외국 공사를 접견하고# #, 여러 연회를 베푸는 등 정치적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에도 순종이 이 곳에서 오찬을 열고# 다과회를 여는 등 활용되었으며# 1917년 창덕궁 희정당과 대조전 등 내전 건물이 전부 불타자 그 곳에 살던 순종과 순정효황후가 임시로 거처하기도 했다.#
이후 큰 훼손 없이 오늘에 이른다. 다만 자동차의 출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애련정 일대의 의두합의 전면이 깎이고, 다른 후원 권역에서 연경당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인 금마문(金馬門)이 개조되는 변화가 있었다.# 2012년 8월 보물 제1770호로 지정되었다.
건립 후 효명세자가 신하들을 접견하거나 진작례[2]를 거행하였다. 헌종 대 이후에는 익종으로 추존 된 효명세자의 어진과 모훈[3]자료를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되다가 1857년(철종 8년)에 터가 서늘하고 습하다는 이유로 익종의 초상화를 다른 곳으로 옮겨 오랫동안 빈 건물로 있었다.#
고종 시기인 1865년(고종 2년) 새로 증축, 신축하였으나 곧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한동안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이후 1884년(고종 21년) 갑신정변 때 청나라 군대에 쫓긴 개화파 수뇌들이 고종을 데리고 이곳으로 잠시 피신하기도 했고, 이외에도 고종과 순종이 외국 공사를 접견하고# #, 여러 연회를 베푸는 등 정치적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에도 순종이 이 곳에서 오찬을 열고# 다과회를 여는 등 활용되었으며# 1917년 창덕궁 희정당과 대조전 등 내전 건물이 전부 불타자 그 곳에 살던 순종과 순정효황후가 임시로 거처하기도 했다.#
이후 큰 훼손 없이 오늘에 이른다. 다만 자동차의 출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애련정 일대의 의두합의 전면이 깎이고, 다른 후원 권역에서 연경당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인 금마문(金馬門)이 개조되는 변화가 있었다.# 2012년 8월 보물 제1770호로 지정되었다.
3. 구조 [편집]
- 연경당을 처음 지을 즈음에 그려진 효명세자 대리청정기에 그려진 《동궐도》를 보면, 지금과는 구조가 많이 다르다. ‘ㄷ’자 형 건물 한 채로만 되어있고, 건물 전면에는 여러 행사를 할 수 있는 넓은 월대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동, 서, 북쪽 담장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형태인 벽돌과 사고석으로 쌓았으나 남쪽 담장은 판자로 되어있으며 출입문은 남쪽에 2칸 짜리 솟을 대문 1개를, 서쪽에 1개를 두었고 남쪽의 솟을 대문 중 큰 칸의 이름을 장락문(長樂門)이라 하였다. 또한 동쪽에 긴 ‘ㅡ’자 형 부속 건물을 남쪽과 북쪽에 각각 한 채 씩 두고 담장과 이었는데 남쪽 건물은 운회헌(雲檜軒), 북쪽은 개금재(開錦齋)라 하였다. 연회, 공연같은 행사를 하기 좋은 구조인데, 애초 연경당의 설립 목적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다. 이런 형태는 철종 연간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이나 고종 때 증축, 신축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동궐도》의 연경당 영역
- 배치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양반가처럼 맨 앞쪽에 행랑채를 두 겹으로 두른 뒤 대문을 두고, 대문으로 들어온 뒤 보이는 행랑채에 각각 사랑채(남성의 공간)와 안채(여성의 공간)로 통하는 출입문을 내었다. 이 출입문도 위계를 두었는데 사랑채로 가는 문은 솟을대문으로, 안채로 들어가는 문은 평대문으로 설치하여 서열을 구분하였다. 남자와 여자의 공간을 엄격하게 나누기 위해 사랑채와 안채의 앞마당 사이에 작은 담을 두었지만, 건물 자체는 연결되어 실내에서 드나들 수 있게 되어있다.#현재 연경당 배치도. ⓵ 장락문(연경당 영역의 정문) ⓶ 장양문(사랑채 출입문) ⓷ 수인문(안채 출입문) ⓸ 안채 ⓹ 통벽문(반빗간 출입문) ⓺ 연경당 본채 ⓻ 선향재 ⓼ 농수정 ⓽ 반빗간(반찬 을 만드는 곳.)
3.1. 연경당 사랑채 [편집]
- 팔작지붕에 홑처마 양식으로 판대공으로 종도리를 받고 중도리와 주심도리로 된 5량가 구조로 되어있다.# 정면 6칸, 측면 2칸이며, 정면 기준 제일 오른쪽에 마루 1칸이 있고 그 서쪽에 대청이 2칸, 사랑방 2칸, 그리고 마루 1칸이 나란히 있으며 서북쪽에 침방 2칸을 두었다.#(실제 칸 수는 측면 수를 곱하면 된다.) 방과 대청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는데 서쪽 온돌방의 툇마루 앞엔 문이 덧대어져 실내로 들어가 있고 대청과 동쪽 온돌방 앞은 막혀있지 않다. 동쪽의 마루는 ‘누(樓)’ 형태로 되어있어 아랫 부분이 화강암 돌 기둥으로 되어있으나 서쪽의 마루는 기단 위에 올려있고 창과 벽으로 마감되어있다.
사랑채 앞마당의 담. 왼족의 문은 안채로 가는 정추문. |
- 서쪽으로 안채와 연결되며 사랑채 건물 서쪽 끝에 안채와 구역을 나누는 작은 담을 앞, 뒤로 설치했다. 뒷마당의 담은 남북축으로 되어있으며 문이 하나 있는데 이름은 우신문(佑申門)이다. 앞마당의 담은 남쪽으로 내려오다 사랑채 출입문인 장양문(長陽門) 근처에서 서쪽으로 꺾이는데 그 부분에 안채와 연결되는 정추문(正秋門)이 동향한 채 있고 거기서 담은 다시 남북축으로 배치되어있다. 그리고 건물 기단 위에 안채로 가는 나무 쪽문을 두었다. 건물과 연결된 앞 마당 담 앞에는 괴석 4개를, 서쪽으로 틀어진 정추문 쪽 담 앞에는 괴석 1개를 두었는데 저마다 크기가 다 다르다.
3.2. 연경당 안채 [편집]
- 건물 구조 자체는 사랑채와 거의 동일하다.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서쪽 끝 1칸이 남쪽으로 돌출되어있으며 누마루로 되어있다. 누마루 북쪽으로 안방이 2칸 있고, 온돌방 동쪽에 대청이 2칸, 건넌방이 2칸, 마루가 1칸으로 되어있다.# 건물 전면에는 툇마루를 두었으며 창이나 문으로 막혀있지 않고 외부와 통하게 되어있다. 서편에는 창 앞에 쪽마루를 놓았다.
4. 부속 건물 [편집]
4.1. 선향재 [편집]
선향재 |
昌德宮 善香齋
연경당의 서재로 사랑채의 동쪽에 위치해있으며 서향하고 있다. 연경당 창건 당시에는 없었고 고종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름은 ‘좋은(善) 향기(香)가 서린 집’이란 뜻이다.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에 대청이 3칸 있고 대청 좌, 우에 온돌을 2칸씩 놓았다. 청나라 양식의 영향을 받아 건물의 양 옆 면 벽은 붉은 벽돌을 쌓고 벽 중앙에는 회색 벽돌로 만든 둥근 틀 안에 화려한 문양을 넣었다. 그리고 벽 아래엔 아궁이를 설치하였다.
연경당의 서재로 사랑채의 동쪽에 위치해있으며 서향하고 있다. 연경당 창건 당시에는 없었고 고종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름은 ‘좋은(善) 향기(香)가 서린 집’이란 뜻이다.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에 대청이 3칸 있고 대청 좌, 우에 온돌을 2칸씩 놓았다. 청나라 양식의 영향을 받아 건물의 양 옆 면 벽은 붉은 벽돌을 쌓고 벽 중앙에는 회색 벽돌로 만든 둥근 틀 안에 화려한 문양을 넣었다. 그리고 벽 아래엔 아궁이를 설치하였다.
선향재 내부, 왼쪽부터 북온돌, 남온돌, 아래가 대청이다. | |
건물 전면에는 차양을 덧대었다. 오늘날의 블라인드와 유사하게 지었으며 삼끈과 도르래를 달아 위치를 조절할 수 있게 했다.# 차양의 지붕은 기와가 아닌 구리 판으로 만들었다. 차양의 안쪽은 나무 판으로 덧대고 나무로 십자 틀을 엮은 형태이다.
선향재 차양의 안쪽 부분 |
4.2. 농수정 [편집]
농수정 |
4.3. 반빗간 [편집]
5. 여담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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